그러나 공간은 새로운 공간에 대한 상상을 통해 시간을 극복하기도 한다. 근현대 공간이론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공간에 대한 상상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투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간이론은 유토피아이론으로 기능해 왔다.
가령 러시아의 지리학자 이자 아나키스트인 표트르 크로폿킨(Peter Kropotkin)의 아나키즘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경도되었던 산업 중심 공동생산 체계와 공리주의적 규율을 비판하고 현실적인 변혁의 공간을 이루려 했다. 크로폿킨은 국가 주도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에 반하여 진정한 진보란 “영역적으로 기능적으로 탈중심화의 방향”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가령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희망의 원칙』(The Principle of Hope)에서 사회 공간에 잠재되어 있는 혁명의 잠재성들이 사회 곳곳에 인간 무 의식의 투영으로 통해 재현 되었다고 본다. 니콜라스 스펜서(Nicholas Spencer) 에 따르면 블로흐는 푸리에나 오웬이나 생시몽의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비판하였다.
블로흐는 19세기의 유토피아들이 과거의 추상적이고 목가적인 유토피아에 매여 있다고 보고, 오히려 현실 속에 아직 오지 않고 잠재된 ‘유토피아적 충동’(utopian impulse)에 초점을 둔다.
각 공간들은 “지각된 것”, “개념화된 것”, “생활화된 것”의 삼 항의 변증법으로 조직된다.
그리고 다시 ‘절대 공간(absolute space),’ ‘추상공간(abstract space),’ ‘모순공간 (contradictory space)’의 변증법을 논하고 그 안에 숨은 ‘차이의 공간’을 추적한다.
우선 공간의 역사를 짚으며 르페브르는 고대로부터 있던 종교적 시설과 같은 역사적 공간을 ‘절대공간’이라고 부른다. 절대 공간은 근원적으로 “농경-목축 의 공간”이다. 절대 공간은 혈족과 토지와 언어가 얽혀진 공간으로 재현 공간의 기반이 된다.
절대 공간은 “무엇보다도 죽음의 공간, 즉 산자에 대해 죽음의 절대적 권력이 미치는 공간”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절대공간으로서의 도시는 죽은 자를 추모하고 그를 통해 왕권을 유지시킨다.
절대 공간에서 종교 시설들은 죽은 자의 권능과 산자의 권력과 합일시킨다. 절대 공간은 산업사회를 거치며 ‘추상공간’으로 변한다.
추상공간 출현의 중심축들은 자본주의와 관료주의로 형성된 주권공간인 국가와 도시들이다.
사회 공간을 통해 사람들은 경제 활동을 하고 또 그 경제 활동을 통해 사회 공간을 생성한다. 사회 공간은 건물들과 정보망들의 생산물이면서도 마찬가지로 사물들의 이동과 사람들의 이동과 모임 등을 통해 생산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무수히 많은 네트워크 혹은 망들이 얽히면서 도시의 공간은 생산되고 생산의 수단이 된다. 르페브르는 특히 이 망들의 ‘리듬’에 주목한다. 마치 물리학의 장(field)과 같이 겹겹이 얽힌 망들은 ‘리듬’을 가지고 서로 간섭하기도 하고 겹쳐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 공간에서 “근대라는 시간은 사회 공간으로부터 사라진다”.
포스트 모던 문화에서의 유토피아적 충동의 재현은 근대와 다르게 “유토피아라는 개념의 재현”이다. 즉 그 자체로 유토피아를 재현하기보다 유토피아라는 개념이 어떻게 현대 사회에서 패러디될 수 있는지 재현한다.
근대의 아방가르드와 그 시대가 꿈꾸던 유토피아적 공간에 대한 충동과 열정은 포스트 모던시대에 상품으로 ‘물화’되었다.
보편적 선의 성취를 위해 만인의 도덕적 의지와 역량을 결집하자는 류의 정치적 호소가 대체로 일소에 부쳐지는 사회적 조건하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성공한 호모 에코노미쿠스 (Homo economicus)가 되어 물질적 풍요가 주는 쾌락을 유예 없이 누리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탈정치적 삶에 익숙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그문트 바우만(Zygmund Bauman)은 “우리 시대는 '개인적 유토피아’의 시대이고, 민영화된 유토피아의 시대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최초의 근대적 유토피언이었던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1516년에 저술한 <유토피아>에서 ‘유토피아’(utopia)란 말의 양의 성을 암시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모어는 ‘유토피아’에 ‘좋은 곳’(eu-topos)이면서 ‘없는 곳’(ou-topos)이라는 모순적 중의성을 부여한다. 그가 묘사한 행복의 섬 유토피아는 간단히 말해 극소수의 법률로 만사가 순조롭게 운영되며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풍족하게 가진 ‘좋은 나라’ 이지만, 그러한 나라는 꿈에나 나올 법한 환상의 공간지평을 표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라’임이 동시에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논자가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도 풍요와 여유, 정의와 평화, 건강과 행복이 만인에게 평등한 선물로 주어지는 공상적 낙원을 표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어의 ‘유토피아’와 다른 점이 없다.
한마디로 그곳에는 ‘착한 인간’과 ‘퍼주는 자연’이 있는 것이다.
공간적 단절성을 특징으로 하는 모어의 해상낙원과 힐턴의 산중낙원 은 행운의 목격자를 만나는 기적을 위해 불의의 ‘조난’을 필요로 하는 피안의 낙토로 설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상적 낙원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실과의 연관성을 상실한 ‘역사적 백지상태’ 위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없는 곳’인 것이다.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가 <유토피아 이야기>에서 제시한 유토피아의 유형학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유형학은 유토피아를 이른바 ‘도피 유토피아’와 ‘재건 유토피아’로 대별하는데, 여기에서 전자는 “사람들이 도피하여 숨는 집”으로, 후자는 “미래에 해방될 수 있는 조건을 제기하고자 시도하게 만드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한 점에서 “도피 유토피아는 외계를 그대로 방치하는 반면, 재건 유토피아는 외계를 변화시키고자”하며, “도피 유토피아가 유토피안의 자아로 역행하는 것인 반면, 재건 유토피아는 외부로, 바깥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술한 공상적 낙원에 투영된 도피 유토피아가 ‘지금’과 ‘여기’의 실제적 혁신을 포기하며 지구의 외딴 곳으로 달아나 버린 자폐적 망상이라면, “재건 유토피아는 [...] 현실의 환경 이상으로 자연이나 그곳에 사는 인간의 목적 에 더욱 잘 맞추어진 환경을 재조직하는 비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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